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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발견한 하루] / 책갈피 모음(+NEW!)





어쩌다 발견한 하루



<책갈피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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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PART.01



선실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 중 크고 검은 눈동자의 젊은 왕자가 가장 멋지게 보였다.

(...)

불꽃놀이가 끝나자 음악이 다시 울려 퍼지고,

미남형의 젊은 왕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손님들과 악수를 나눴다.

밤이 점점 깊어졌지만,

인어공주는 멋진 왕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PART.02


인어공주는 배 위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단 한 사람, 왕자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 바다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물속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왕자를 발견했다.


'안 돼! 그가 죽게 놔둘 수는 없어!'


어린 인어공주는 수면 위에서 거친 파도를 따라

마구 움직이는 대들보와 판자 사이로 헤엄을 쳤다.

그것들에 부딪치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바닷물 속 깊이 들어가고,

거친 파도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가까스로 젊은 왕자에게 다다랐다.


그는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헤엄칠 힘을 급격히 잃고 있었다.

그의 팔다리가 점점 느리게 움직이고,

그의 아름다운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인어공주가 왕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왕자를 안은 인어공주는

왕자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왕자의 얼굴을 수면 위로 나오게 하고

파도를 따라 해안가로 향했다.



<느닷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느닷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그 사람 겨우 닿을 듯한 거리에서

방금 막 날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빤히 바라보는 것이다.


한동안은 그 느낌 속에 있었다.

아주 짧으나 어쩌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이

내 앞에는 펼쳐져 있었다.




<사랑의 일>


너는 내가 없다고 세상이 엎어지거나 외로워지거나 사무치지 않겠지만,

나는 네가 없는 작은 순간에도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보는 것처럼 모든 세상의 경계가 흐드러졌다.

와중에도 너 하나만 선명해서 깊이 외로웠다.

너를 만나 내 사랑은 자주 울었지만,

더 환하게 웃기도 했다.

사랑이 하는 일 열 가지 중 아홉이 슬프다면,

하나가 기뻤다.


내 불행을 모조리 팔아

찰나의 행복을 사는 일이 사랑이기도 했다.




<이제 어쩐다>


'어쩌다'였다. 그 단어가 없었으면 설명하지 못할 일이었다.

당신과 마주친 일도, 당신의 눈에 내가 담긴 일도,

당신과 손을 잡은 일도, 당신과 사랑하게 된 일도.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어쩌다'.

강렬한 빨간색도 아니었고, 편안한 초록색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발랄한 노란색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더 강렬하고 편안하고 발랄한 파란색.

당신을 바라보며 정의할 수 있었던 색이다.

자유를 대변하는 '파란'의 당신.

세상의 것들 중 가장 흔했으며 가장 자주 볼 수 있었던 색.

당신은 '어쩌다' 나의 파란 하늘이었고,

파란 바람이었고, 파란 파도였다.

흔해빠진 색으로 물들어버렸다.

그것마저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딜 가든 파란색이었다. 기다렸다는 마냥.

이유도 모른 채 '어쩌다' 폭삭 물들어버려서, 갇혀버렸다.

이제 어쩐다. 세상 곳곳이 당신이다.




<첫사랑>


눈을 다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비탈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답했다.

두 발 없이도

아니, 길이 없어도

나 그대에게 갈 수 있다고.




<사랑하는 별 하나>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 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외로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천 년 동안 고백하다>


내가 엮은 천 개의 달을 네 목에 걸어줄게

네가 어디서 몇 만 번의 생을 살았든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않을게


네 슬픔이 내게 전염되어도

네 심장을 가만 껴안을게

너덜너덜한 심장을 봉합해줄게


들숨으로 눈물겨워지고 날숨으로 차가워질게

네 따뜻한 꿈들을 풀꽃처럼 잔잔히 흔들어 줄게

오래오래 네 몸속을 소리 없이 통과할게

고요할게


낯선 먼먼 세계 밖에서 너는

서럽게 차갑게 빛나고

내가 홀로 이 빈 거리를 걷든, 누구를 만나든

문득문득 아픔처럼 돋아나는 그 얼굴 한 잎


다만 눈 흐리며 나 오래 바라다볼게

천 년 동안 소리 없이 고백할게





<모순>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나. 

한없이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해 주는 그가 고맙다고.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그대가 멀어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어쩐지 그대는 영영 떠나갈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떠난 뒤,

그 상처와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한 순간 가까웁다가 영영 그대를 떠나게 하는 것보다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오래도록 그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기에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귀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천 년의 사랑>


내 삶이 왜 당신과 함께여야 하는지

그것도 당신은 의아하겠지요.

하필이면 왜 나였느냐고 묻는

당신의 얼굴이 환히 떠오릅니다.

그래요. 하필 왜 당신이었겠습니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다 놓아두고

왜 긴긴 시간 기다려야만 내게로 오는 당신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우연도 아닙니다. 우연이라니요.

이토록 간절히 그리운 사랑이 우연이라면

당신인들 납득하겠습니까.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도록 아주 오랜 시간 저편에서부터,

천년도 넘는 저쪽의 먼먼 옛날부터 진행되어온 일입니다.

20세기*의 이 나라 이 땅에서 당신과 내가 만나,

그리움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하여

기어이는 사랑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부여받은 현생에서의 과제입니다.

그러기에 이토록이나 간절한 것입니다.

천년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나의 당신.



양귀자, <천년의 사랑>中




*책에는 20세기라고 적혀있었지만 지금은 21세기니까 바꿔보았다.





*

새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하루를 놓지 못하는 삶...